'부산은 보물창고 같은 도시다. 알 만큼 안다고생각했을 때쯤 새로운 무언가를 툭 꺼내서 보여 준다. 도심 바로 곁에 조성한 편백나무숲이 대표적이다.이곳에 이런 멋진 숲이 있으리라고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부산의 등줄기, 구덕산
부산 도심에서 불과 15분쯤 들어왔을까. 서구의 구덕문화공원 안쪽으로 이렇게 호젓한 공간이 있을 줄이야. 게다가 높다란 편백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숲속에 들어가 있으면 여기가 부산이라는 사실이 믿기 어려울 지경이다.
구덕문화공원은 서구를 감싸고 있는 구덕산 자락에 있다. 구덕산은 높이 565m로, 부산의 등줄이라 할 수 있는 금정산맥(낙동정맥) 말단부에 해당한다. 여기서 북동쪽으로는 엄광산, 남서쪽으로는 시약산이 이어진다. 남동쪽에는 보수천 발원지가 있다. 여기서 솟은 물줄기가 부산 최초의 급수원인 구덕수원지의 물이 된다.
산 많고 비탈 가파르기로 유명한 부산에서 구덕산은 지형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보통 산의 이름에 구(九)나 덕(德)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면 불교와 관련이 깊다고 보는 의견이 있다. 이 산이 과거에 불교 관점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겠느냐는 주장이 나오는 근거다. 한편으로는 순우리말인 ‘구덩이’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실제로 이 산은 가파른 경사와 비탈도 있지만 움푹 파인 구덩이도 많다. 지금의 구덕터널이 지나는 위쪽의 구덕령(九德嶺)을 ‘구덩이재’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 의견도 어느 정도 일리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여기에 구덕산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닌 듯하다. 일본인이 남긴 <조선부호여록>을 보면 19세기 말에는 이 산에 ‘사병산’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사병산은 사방을 병풍처럼 둘러친 산이라는 의미로, 지리학 분야에서는 노년 산지 전형을 보여 주는 것으로 풀이한다. 이런 이유로 구덕산이라는 이름은 이로부터 한참 뒤에 붙은 것으로 보인다.
구덕산으로 오르는 발치에 구덕문화공원을 조성한 것은 2004년 수목원을 만들 때다. 처음에는 ‘수목원’이라고 불렀지만 2007년에 박물관, 전시관, 체육 시설 등을 갖춰 종합 편의시설 기능이 가능하게 되면서 ‘구덕문화공원’으로 바꿔 부르게 됐다.
삶의 고단함을 씻어 주는 향기
공원 주차장을 지나 오솔길을 따라 걷는다. 숲의 안쪽으로 들어서서 걷다 보면 편백나무 군락지가 나온다. 수백 그루의 편백나무가 수백 개의 가시처럼 뻗어 있다. 나무 사이 거리도 가까워서 빽빽한 느낌이 한층 더 강렬하다. 산책길은 군락 사이로 나아가도록 조성돼 있다.
이 자리에 원래부터 편백나무가 자란 것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편백나무를 가져와서 심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7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키는 5m 넘게 자랐고, 나무 하나의 지름도 20㎝가 넘는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나무가 하나같이 늘씬하다. 편백이라는 수종은 병충해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살균물질을 뿜어낸다. 이것이 ‘피톤치드’다. 가슴을 열어젖히고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면 상쾌한 향이 몸속 깊숙이 스며드는 느낌을 받는다. 피톤치드는 스트레스 해소와 아토피 완화 등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침엽수는 기본적으로 피톤치드를 내뿜는데 그중에서도 편백나무가 피톤치드 방출량이 가장 많다.
좀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일상의 고단함에 지칠 때 도심 바로 곁에 있는 이 숲을 찾아온다면 그야말로 몸과 마음이 치유됨을 경험하게 될 듯하다. 이 숲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도 더없이 좋은 사색 공간이 된다. 산책로를 걸으며 편백나무가 선물하는 맑은 공기를 한가득 들이마시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정화되는 느낌을 받는다. 편백숲을 거닐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맞장구칠 경험인 듯하다. 걸으며 하는 명상을 행선이라고 한다. 이 숲의 산책로는 그 자체로 명상 공간이 돼 준다. 한참을 걸으면서 왜 이 길에 ‘명상의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를 생각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숲의 호흡이 나의 호흡과 만나 가슴속 깊숙이 찌들어 있는 무언가를 모두 털어내게 하는 곳. 도시에서 만나는 이런 숲이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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