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숲 이야기
비극의 아픔이 서린 고개, 화순 너릿재 옛길 주소복사

'이 고즈넉한 길에 그토록 많은 애환과 아픔이 서려 있는 줄은 몰랐다. 

무심코 걷기만 했던 사람은 끝내 알 수 없을 만한 이야기가 많다.'



숲은 말이 없다

너릿재는 화순의 진산이 되는 만연산과 안양산이 무등산으로 이어지는 산맥을 따라 자리하고 있다. 광주와 화순의 경계에 있어 예전에는 이 길이 두 지역을 연결하는 주요한 통로가 됐다. 1971년 너릿재 터널이 생기면서부터는 이 길로 차가 다니지 않는다. 하지만 그전에는 광주에서 화순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너릿재를 차로 넘어야 했다. 


너릿재라는 이름은 1757년 <여지도서>의 도로편에 처음 등장한다. 내용 중에 ‘판치(板峙)’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를 우리말로 하면 곧 너릿재다. <대동지지>에도 ‘판치는 북쪽 10리에 있으며 광주와 경계다’라는 부분이 수록돼 있어, 최소한 1700년대부터 이 길을 판치 혹은 너릿재라 불렀다는 걸 알 수 있다. 


여기에 왜 이런 명칭이 붙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한쪽에서는 구전으로 전해 오는 내용을 공식화하고 있다. 옛날에는 이 길이 깊고 험했는데, 고개를 넘던 중에 산적이나 도둑을 만나 죽은 사람이 판, 그러니까 널에 실려 너릿너릿 내려온다고 해서 너릿재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다. 다른 쪽에서는 고갯마루가 널찍하면서 평평하다는 뜻으로 판치(板峙)라 불렀다는 내용을 좀 더 강조한다. 두 내용은 모두 길 위에 설치한 안내판에 담겨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어느 쪽의 내용을 따라야 할지는 아리송하다.


너릿재의 옛길이 다른 무엇보다 관심을 끌었던 것은 동학혁명 당시 이곳에서 수많은 농민이 처형당했다는 문구였다. 이 고개를 너릿재라 부르는 연유에 대해서도 이 사건과 연관 짓는 주장이 있는데, 당시 수많은 널(관)이 이곳을 너릿너릿 지나갔다는 내용이다. 1946년에는 여기서 어처구니없는 사건도 벌어졌다. 광복 1주년을 맞던 날 광주에서 열린 기념식에 참가하기 위해 화순의 탄광노동자와 주민이 너릿재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밤 3시에 ‘완전 독립을 보장하라’ ‘쌀 배급을 늘려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고개를 넘던 중에 미군정에 의해 학살을 당했다. 당시 2600명에 달하는인원이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1950년 9·28수복 때는 경찰과 청년들이 인민군에 의해 희생됐고, 1980년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바로 이곳에서 계엄군의 총격으로 버스에 타고 있던 승객 30명이 변을 당했다. 이 고개에서 비극이 반복된 것이다. 그래서 이 아름다운 숲길이 조금은 처연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아름다운 길

너릿재를 걷다 보면 여러 종류의 안내판을 수시로 마주한다. 지명의 유래부터 이곳에 서식하고 있는 생물과 관련한 정보 등 이곳을 가꾸는 사람들이 여기에 얼마나 많은 애정을 쏟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너릿재 아래를 관통하는 터널이 두 개나 뚫리면서 이 고개로 차가 다니지는 않지만, 이제는 트레킹 코스로 이름이 나기 시작했다. 산악자전거 마니아나 산길을 따라 뛰는 트레일의 최적지로도 제법 유명하다. 길을 걷는 동안 수시로 자전거가 지나가고 뜀박질에 열중하는 사람을 만난다. 그만큼 이 길은 크게 힘이 드는 구간도 아니면서 적당히 산의 허리를 둘러 오르는 재미가 있다. 너릿재 옛길이 1년 중 가장 빛나는 계절은 봄이다. 길을 따라 벚나무 600그루를 심었는데, 지역민에게 큰 사랑을 받는 명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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