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에나 나올 법한 숲이었다.
숱하게 드나들었던 이 섬에, 이 자리에 이런 숲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독일마을 아래 어촌마을의 보물
경남 남해는 다리가 세 개나 연결돼서 편히 다녀올 여행지다. 그러나 불과 20년 전까지만 해도 그리 주목받는 곳은 아니었다. 그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70개의 크고 작은 부속 섬이 있고 302㎞의 해안선을 가졌다. 섬 안쪽으로는 울창한 숲을 이룬 산이 옹기종기 모여 있기도 하다. 산과 바다의 매력이 조화를 이뤄 여행지로서는 아주 매력적인 지역이다.
독일마을은 남해 여행지 중에서도 대표적인 곳이다. 1960년대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이역만리 타국인 독일에까지 나가 외화벌이를 하고 돌아온 이들을 위해 마련한 곳이 이제 남해에서 가장 화려한 여행지가 됐다. ‘물건방조어부림’이라는 꽤 낯선 이름의 숲은 독일마을에서 지척인 곳에 자리한다. 독일마을에서 바다를 향해 서면 저 멀리 해변을 따라 늘어선 나무의 행렬을 볼 수 있는데, 그곳이 바로 물건방조어부림이다.
어부림이라는 단어는 아무리 들어도 그 의미가 쉽게 와 닿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어부림이란 그 기능을 전면에 내세운 명칭인 데다 우리 곁에 어부림이 있는지도 잘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어부림은 바다나 강가에 조성한 숲을 이르는 말이다. 숲의 초록이 짙어지면 나무 그늘이 드리워지고, 그러면 물속의 고기떼가 그 그늘을 찾아 들어온다. 자연스레 고기가 잘 잡히기 마련이다. 어업이 흥하면 마을이 번창하는 게 수순이다. 그래서 어부림이다. 이런 연유를 모르는 탓에 독일마을을 찾은 대부분의 관광객은 멀리서 물건리 해안가의 풍광만 감상하고 돌아갈 뿐이다. 이 숲이 얼마나 흥미로운 곳인지는 아는 사람 사이에서만 입소문으로 알려져 있다.
남해는 과거 연락선이 없으면 육지로 나가거나 섬으로 들어오기 어려운 곳이었다. 사람의 발길이 뜸하니 자연스레 섬 안에 숲이 꽤 많이 남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곳이 물건리의 어부림이다. 무려 370년. 남해군은 섬 내의 볼거리 열두 군데를 선정해 12경으로 홍보하고 있는데, 어부림도 그중 하나다. 그렇지만 바로 위의 독일마을에 비하면 관광객은 여전히 뜸하다.
어부림의 기록을 되짚어 올라가면 과거 전주 이씨 무림군의 후손이 이곳에 정착해서 숲을 조성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전에도 마을은 있었지만, 풍랑이 일 때마다 피해가 극심했던 모양이다. 전주 이씨와 연관된 내용이 실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곳에 숲을 조성한 이후 해일이나 풍랑에 의한 피해가 급감했다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숲을 베려면 우리부터 베어라”
이 숲은 19세기 말엽에 한 번 벌채가 이루어진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후 폭풍우가 몰아닥치자 많은 이가 목숨을 잃었다. 그 뒤로 숲을 해치면 마을이 망한다는 이야기가 대대로 전해 온다. 일제강점기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뻔했다. 전쟁 중인 일본인들이 목총을 만들기 위해 일곱 그루의 느티나무를 베려고 했던 것. 당시 마을주민은 “숲을 베려거든 우리부터 베어라!”라며 강경하게 버텼다. 그 기세를 감당할 자신이 없던 일본인들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숲에서 물러났다는 일화가 있다. 지금도 어부림은 마을에서 무척 신성시하는 존재다. 숲을 찾은 이가 어부림에 대한 존경심을 갖춰야 하는 이유다.
해안가에 조성한 이 숲의 규모도 상당하다. 숲의 길이만 1.5㎞에 달하고 너비는 30m 정도다. 면적은 무려 2만 3000㎡(약 6900평). 멀리서 보았을 때는 그리 커 보이지 않지만 숲 안으로 들어가면 빽빽하게 치솟은 원시림의 위용에 압도당한다. 숲 안에는 나무로 덱을 깔아서 남녀노소 누구나 산책을 하며 숲을 즐기게끔 해 두었다. 덱 양쪽으로 펼쳐진 나무마다 안내판을 달아 놓아 이것이 어떤 나무인가 생김새를 자세히 살피기 좋다.
수종도 무척 다양하다. 남해에서 흔히 보는 수백 년 된 팽나무가 건재하고, 상수리나무·느티나무·이팝나무·푸조나무 같은 낙엽수부터 후박나무 같은 상록수가 한데 어우러져 있다. 흔히 보기 어려운 나무도 많다. 열매가 말의 얼굴을 닮았다는 마삭줄, 귀신에 홀린 사람을 이 나무로 만든 몽둥이로 때려 귀신을 쫓았다는 무환자나무, 열매가 쥐똥 같다고 하는 쥐똥나무 등 재미있는 이름과 유래를 가진 나무가 길가에 널려 있다. 그 수만 100여 종에 달하고, 1만 그루의 나무가 길게 늘어서 있어 나무전시장이나 다름없다.
산책로를 따라 걷는 중에 나무 건너로 바닷가의 풍경이 보인다. 지금은 방파제를 쌓아 바다가 무척 고요하다. 등대가 서 있고, 맑은 물이 찰랑찰랑 콩돌 해변을 오간다. 숲은 숲대로, 바다는 바다대로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케 하는 곳. 남해를 여행할 생각이라면 이 숲은 꼭 한번 찾아갈 만한 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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