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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집] 궁궐의 오래된 나무 이야기 #경복궁 주소복사


#1

생명의숲 X 박상진 교수

궁궐의 오래된 나무 만나기 #경복궁


나무 할아버지와 함께 하는 궁궐의 오래된 나무 # 미리보기


#2

● 행단(杏壇)을 지킨 은행나무


명종 17년(1562) 3월 4일 임금은 나라의 큰 경사인 가례嘉禮를 치르고도 일이 많아서 여태 아랫사람 대접하지 못하였으니, 10일에 은행정에서 잔치를 베풀게 하라고 합니다. 후원에 있는 은행정에서 2백여 인이 참석하여 축하행사는 성대하게 치러집니다. 


“오늘은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조금이라도 마실 줄 아는 자라면 맘껏 술을 들고 흡족하게 즐기도록 하라.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기어 위아래의 정이 돈독해진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상하를 가리지 말고 어울려 일어나 춤을 추는 것이 어떠한가? 예관禮官과 함께 의논해서 아뢰도록 하라.” 고 합니다. 


그러나 임금의 뜻대로 어우러져 신나게 춤추는 일은 예관들의 반대로 이루어 지지 않았답니다. 명종 때이니 후원이라면 지금의 청와대 자리입니다. 오늘날 경복궁 건춘문 앞에는 당시의 ‘은행정’ 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3

● 도깨비도 보듬어 주는 왕버들

《오산설림초고五山說》란 책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조선 7대 임금 세조는 대군시절 불과 14살의 어린 나이에 벌써 기생집을 출입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밤, 기생방에 잠들어 있을 때 기생의 기둥서방이 예고 없이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는 군요. 놀란 그는 뒷벽을 발로 차고 튀어나와 담을 넘고 높은 성벽까지 뛰어넘어 도망치는 데도 기둥서방이 계속해서 뒤쫓아 옵니다. 숨을 곳을 찾다가 속이 텅 비어 있는 고목 왕버들 한 그루를 발견하고 썩은 구멍 속으로 겨우 몸을 피했습니다. 얼마 뒤에 밤중에 오줌 누러 나온 한 점잖은 사람이 별자리를 보고 ‘반드시 임금이 버들에 의지한 상인데, 거참 이상한 일이다.’고 혼자 중얼거렸답니다. 훗날 임금이 된 세조는 그를 찾았으나 죽은 지 오래 되었으므로 후손들에게 크게 상을 내렸다는 내용입니다.


왕버들은 이름에 버들이 들어 있지만 가지가 굵고 튼튼하여 연약한 버들과는 사뭇 다릅니다. 수백 년을 거뜬히 살 수 있으며 아름드리로 자라고 모양새도 웅장합니다. 왕버들은 습기가 많고 축축한 땅을 좋아하여 개울가나 호수가에 흔히 자랍니다.


#4

● 버들과 사랑, 그리고 화류계

늘어진 버들가지는 부드러움과 연약함이 가냘픈 여인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버들에 얽힌 가장 많은 주제는 사랑과 이별이죠. 옛사람들이 연인과 헤어질 때 마지막 이별 장소는 흔히 나루터가 됩니다. 버들가지를 꺾어주면서 서로 사랑의 마음은 전했다고 합니다. 버들은 남녀 간의 사랑뿐만 아니라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양류관음도와 수월관음도는 관세음보살이 버들가지를 들고 있거나 병에 꽃아 두고 있는 형식입니다. 

세조는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시켜 영월로 쫓아내고 낮잠을 자는데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꿈에 나타나서 당신의 아들도 데려가겠다며 얼굴에 침을 뱉었다고 합니다. 공교롭게도 세조의 아들인 왕세자가 깊은 병이 들자 버들로 둘러싸인 경회루 아래에다 승려 20여명을 불러 재를 올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효험도 없이 20살에 요절하고 맙니다.

그러나 버들과 꽃이 섞인 ‘화류'는 순수한 사랑이 아니라 퇴폐적인 뜻이 됩니다. 몸을 파는 여인을 두고 ‘노류장화’라고 하여 길가에서 흔히 만나는 버들이나 담 밑에서 핀 꽃은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아도 누구나 쉽게 꺾을 수 있다는 뜻으로 빗댄 말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어울려 노는 곳을 아예 화류계라 한답니다. 


#5

● 뽕나무와 누에의 천생연분


태종11년(1411) 임금은 이렇게 역정을 냅니다. ‘옛날에는 후궁들이 부지런하고 알뜰하여 친히 누에를 쳤는데, 지금은 아래로 궁중 시녀까지 모두 배불리 먹고 할 일없이 내 옷까지도 모두 사서 바친다. 앞으로는 시녀들로 하여금 길쌈을 맡아서 내용에 대비하게 하라.”고 합니다. 이후로 예부터 내려오던 친잠례를 강화하여 왕비가 직접 비단 짜는 시범을 보기이도 하죠. 

세종5년(1423) 잠실을 담당하는 관리가 임금께 올린 공문에는 '뽕나무는 경복궁에 3,590그루, 창덕궁에 1천여 그루, 밤섬에 8,280그루가 있으니 누에 종자  2근 10냥을 먹일 수 있습니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렇게 넓지도 않은 경복궁에 이렇게 뽕나무가 많았다면 그야말로 ‘뽕나무대궐’이 되었음 직하겠죠. 비단 생산은 계속하여 더욱 늘려야 했습니다. ‘비단입국‘의 기치를 높이 든 이유는 중국과의 무역과 신흥귀족들의 품위를 높이기 위한 비단의 수요도 만만치 않아서 입니다.


뽕나무는 누에치기만이 아니라 약제의 원료로서 쓰임새는 끝이 없습니다. 열매인 오디는 이뇨 효과와 함께 기침을 멈추게 하고 강장작용이 있으며 기타 여러 질병의 치료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답니다. 


#6

● 태조 이성계와 돌배나무

태조 이성계는 특히 배나무와 인연이 많았답니다. 무학대사 토굴이 있던 곳에 절을 세우고 거기에 배나무를 손수 심었다고 합니다. 

전북 진안 마이산 은수사에 있는 청실배나무는 명산인 마이산을 찾아가서 기도를 마친 뒤 그 증표로 심었다는군요.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조가 일찍이 친한 친구들을 모아 술을 준비하고 과녁에 활을 쏘는데, 배나무가 백 보 밖에 서 있고 배 수십 개가 서로 포개어 축 늘어져서 있었다. 손님들이 태조에게 이를 쏘기를 청하므로, 한 번에 쏘아서 다 떨어뜨렸다. 가져와서 손님을 접대하니 여러 손님들이 탄복하면서 술잔을 들어 서로 하례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신궁으로 알려진 태조는 이처럼 활솜씨 자랑에 배나무를 이용한 것입니다.

산속에서 아름드리로 자란 돌배나무는 또 다른 쓰임새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무 속살은 너무 곱고 치밀하여 글자를 새기는 목판 재료로 그만이며 팔만대장경판에도 일부가 돌배나무입니다. 


#7

● 고종이 좋아하신 고종시 감나무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조선 인조 13년(1635) 11월 4일 청나라는 ‘해마다 홍시(紅柿) 3만 개를 요구하니, 임금이 주라고 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원래 감은 중국남부가 원산지이니 만주를 근거지로 한 청 태종은 물론 지배 계층들은 평생 감 구경을 못했습니다. 잘 익은 달콤한 홍시를 처음 맛본 그들은 진한 단맛에 흠뻑 빠져 이렇게 엄청난 양의 홍시를 매년 보내주도록 요구한 것입니다. 감나무는 서울에서 자라기는 조금 추우며 연산 10년(1504)에 ‘홍시는 생산되는 지방에서 따로 봉하여 올리게 하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지금은 기후 온난화 영향으로 궁궐의 여기저기에서 흔히 감나무를 만날 수 있답니다. 

고종의 거처였던 건청궁을 복원하면서 고종이 좋아하여 고종시(高宗柹)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고종시 감나무를 경남 산청에서 옮겨다 심었습니다. 감나무는 재질도 좋아 속에 검은 무늬가 들어간 먹감나무, 느티나무, 오동나무와 함께 주요한 옛 가구재였습니다.


#8

생명의숲은 경북대 명예교수 박상진 선생님 과 함께

 우리 주변의 고목나무들을 찾아 지금의 실태를 파악하고 알리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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